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아마르 카다피 (문단 편집) == 설명 ==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2011년 축출될 때까지 '''무려 42년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했다.[* 사망 당시 시점에서는 [[피델 카스트로]], [[장제스]], [[김일성]]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 집권한 독재자였으며, 2023년 기준으로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에 밀리긴 해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 집권한 독재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권력자로 있으면서 다양한 행적을 보였다. 정치적으로 독재 이외에 '''[[반미]]''', '''[[사회주의]]'''[* 그렇다고 공산주의는 아니다.], '''[[아랍 민족주의|범아랍주의]]''' 등의 키워드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말년의 막장행보와는 별개로 석유국유화 행보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는 중동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가 별로 없었고, 또한 쿠데타 이전 [[리비아 왕국|기존 왕실]]은 서방과 결탁하였었기에 부의 분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었으며, 미국은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에 서방국가들이 산유국들에게 한 짓거리라고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현지 고위 권력층과 결탁해 자원을 값싸게 후려치는 짓 따위였으니 그에 대한 반발도 심했고, 당시 [[아랍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서 카다피의 리비아는 독보적으로 국민소득 수준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의 아랍사회주의 국가들을 본다면 이라크가 리비아처럼 석유로 인해 득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리비아의 반도 안되는 4,000달러 언저리 이내였고, 알제리가 2,100달러대였다, 시리아나 이집트, 북예멘, 남예멘 등은 당시에도 잘 살지 않았는데 시리아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이집트는 산업화에 실패해서 500달러대에 머물렀고, 북예멘 남예멘은 막대한 석유자원에도 국가발전에 처절하게 실패해서 1인당 국민소득이 당대기준으로도 하위권이었다.]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석유국유화 덕으로 크게 향상되었으니 그와 함께 카다피가 높게 평가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높게 평가받았냐면 그것 역시 결코 아니었고 실상 아랍권에서도 호불호가 격렬히 갈렸던 인물이었다.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복무 중 27살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의 국가원수, 국가평의회 의장(국회의장), 총리, 국방장관 등 입법부와 행정부의 요직을 모조리 독점하며 국가 운영에 필요한 모든 권력을 혼자서 행사했다.[* 1960년대 기준으로 비군주국 중에서도 최연소였다. 2년 뒤 아이티의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집권하면서 최연소 타이틀은 그에게 넘겨준다.] 이후 1977년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주창함과 동시에 다시 '''[[헌법]]과 [[의회]]를 폐지'''하고 자칭 자마히리야[* 인민 공동체, 인민권력이라는 뜻.] 체제를 선포하여 '''전제적 독재권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카다피 정권 시기 리비아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제를 택했던 알제리나 이집트, 튀니지 같은 주변 아랍국가들과는 차이가 컸다. 밑의 집권과정 항목 참조.] 과거 중동 일대에서 강경 [[반미]]성향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 과정에서 테러 등도 서슴없이 강행하다보니 [[서구권]]으로부터 ''''사막의 미친개'''', ''''아랍의 [[망나니]]''''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렸으나 2000년대 이후로는 미국과 관계 회복을 어느 정도 이루어내서 많이 사그라들었다. 2009년 [[UN]] 연설 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아프리카의 왕중왕으로 자칭했다. [[리비아]] 내의 타민족 간의 통합 및 한국 건설회사를 통한 대수로 건설[* 그 건설회사 중 하나가 [[동아건설]]인데, 이놈들은 나중에 '''[[성수대교 붕괴사고|부실공사로 한강 다리가 붕괴되게 만든다]]'''. 동아건설의 모기업인 [[동아그룹]]은 [[1997년 외환 위기]] 때 부도가 나서 해체되었다. 그 동아그룹의 계열사 중에는 [[CJ대한통운|한 택배회사]]가 있었다. 참고로 전성기인 1984년에는 2만 명의 인부가 건설에 참여해 무려 37억 달러, 당시 GDP의 3%를 따내기도 했다. 77년부터 한국이 따낸 건설 수주만 총 '''366억 달러'''로 지금 GDP로도 넉넉히 1/7이 되고 1984년 GDP로는 30%나 된다. [[동아그룹]]의 [[최원석(기업인)|최원석]] 회장,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과도 친했다. 최 회장은 카다피를 카 선생이라고 불렀고 카다피는 그와 만난 자리에서 서투르지만 [[한국어]]로 헤잔님(회장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 정부]]는 좀 배은망덕이란 드립이 나올 수도 있다.]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94782|관련기사]]. 등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부족주의 전통이 강한 북아프리카-중동의 다른 독재자들[* 아사드, 후세인, 벤알리, 무바라크, 살레 등등. 다만 벤알리가 집권했던 튀니지와 무바라크가 집권했던 이집트의 경우 아랍권에서도 부족주의가 약하다.]이 으레 그랬듯 해당 과정에서도 자기네 부족을 더 우대하고 친지들을 요직에 배치하며 세습제 국가를 만들려는 시도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2011년,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으로 반대세력의 저항에 직면했다.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한 전면전이자 살육전으로 맞대응했으나 이로 인해 카다피 정부군과 시민군 간 [[리비아 내전|내전]]이 촉발되었고 같은 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의 무력 개입인 [[오디세이 새벽 작전]]으로 인해 2011년 8월 정권이 무너지면서 리비아 정국을 장악한 반카다피 시민군 세력들을 피해 이곳저곳을 피해다니는 처량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2011년 10월 20일 그의 고향이자 마지막 거점인 시르테(Sirte)에서 나토군의 공습에 이은 시민군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였다. 한국 입장에서는 1970년대 한국 기업들이 석유붐을 타고 중동에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 카다피 정권의 리비아도 한국기업들에게 '대수로 공사' 등을 발주했고, 그 때문에 한국기업이 70년대에 이미 리비아에 진출했다. 덕분에 중동 건설 붐이 일때 한국 언론에도 종종 등장하여 그때부터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